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23세 (문단 편집) ==== [[사제(성직자)|사제]]가 되기 전 ==== * 안젤로의 생일이 11월 하순이기 때문에, 아래에서 나이를 표기할 때에는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고 간주한 [[만 나이]]로 통일하여 쓴다.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미래의 요한 23세는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의 시골 마을 소토 일 몬테(Sotto il Monte)[* [[이탈리아어]]로 '산 밑 마을'이란 뜻이다. 훗날 요한 23세를 기리고자 마을 이름에 '요한 23세'를 덧붙여, 소토 일 몬테 조반니 벤티테레치모(Sotto il Monte Giovanni XXIII)가 되었다.]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1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훗날 안젤로 론칼리는 어려웠던 생활을 회고하며 말하길, "남자를 망치는 것이 3가지 있는데, 술, 여자, 그리고 [[농사|농삿일]]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농삿일로 당신 자신을 망치셨습니다." [* [[농사]]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15명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가장이 농삿일에 매달리는 것은 온 몸을 망가트릴 만큼 고된 일이 아니었을까? 요한 23세의 이 말은 평생 고생한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묻어난다.] 이런 와중에도 신심 깊은 부모, 특히 어머니의 영향으로 안젤로 역시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다. 그 덕에 7세이던 1889년 2월에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매우 빨리 [[영성체|첫영성체]] 및 [[견진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가난한 농부 집안의 아들이었고 주변에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젤로는 별나게도 공부를 무척 좋아하고 머리가 좋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삼촌 자베리오가 퍽 놀랐다고 한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머리 좋은 티가 나자 반 친구들이 방과 후에 불러내어 때린 적도 있었다. 학교에 가지 앉는 날에도 안젤로는 독학을 하거나 자베리오로부터 배웠다. 가족들에게 처음 [[사제(성직자)|사제]]가 되고 싶다는 뜻을 드러내었을 때 대다수 가족들은 '우리 집안에서 무슨 사제냐?' 하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젤로를 눈여겨 보던 삼촌 자베리오는 그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삼촌의 도움을 받아 안젤로는 1892년(10세)에 가장 가까운 도시 베르가모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여기서 '소신학교'는 마을의 초등학교 위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해당했기 때문에, 소신학교에 들어간다고 꼭 안젤로가 신학생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근방에서 초등학교 이상의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들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 이와 비슷한 당시 유럽의 상황을 해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볼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공부 잘 하는 초등학생이지만 독일의 정식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에 진학할 돈이 없어서 '신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소설 속의 묘사를 보면 기벤라트 집안은 특별히 가난해 보이지도 않지만 (아버지가 평범한 소상공인이다) 한스는 신학교 말고 김나지움에 가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가 기벤라트 집안이 갑부냐?는 식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정식 고등학교는 집안이 꽤 잘 살아야 가는 곳이었고,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 하면 신학교 같은 무료 교육기관으로 진학해야 했으며, 대부분의 소년들은 초등교육을 마치면 대부분 곧바로 도제가 되거나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아마도 이미 그때부터 안젤로는 사제가 되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처음 안젤로가 베르가모로 가던 날, 어머니가 온 집안을 뒤져 보았지만 있는 돈이라고는 단 2리라였다고 한다. 농촌 마을이라 어지간한 물건을 다 [[물물교환]]으로 얻었기 때문에 화폐가 별 필요가 없었던 것. 어머니는 도시로 공부하러 가는 장남에게 그 2리라를 건네주면서 울었다. 안젤로는 베르가모에서 공부하다가, 소신학교에 입학하고 3년이 지나 1895년(13세)에 삭발례[* 신학생이나 성직자, 수도자들이 정수리 부분만 동그랗게 삭발함으로써 속인과 구분되는 인물임을 표시하는 의례. 오늘날 [[가톨릭]] [[사제(성직자)|사제]] 양성 과정에서는 삭발례를 하지 않는다.]를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신학생으로서 성직자 입문단계를 밟았다. 그러나 아직 [[사제(성직자)|사제]]가 된 것도 아닌데도, 휴가 기간에 고향으로 돌아갈 때면 마을 사람들은 마치 안젤로가 이미 [[신부(종교)|신부]]가 된 양 존대했다고 한다. 안젤로는 이러한 것을 거북하게 여겼다. 그러한 대접에 질투가 났는지, 한번은 다른 사제에게 안젤로의 가족들 중 누군가가 '벌써 신부라도 된 양 거만하게 군다.'는 말을 흘렸다. 이 말이 신학교에까지 전해지자 안젤로는 '너 자신을 낮추라.' 하는 꾸지람을 들었다. 1898년(16세)에는 평생 동안 큰 영향을 받은 라디니-테데스키 [[몬시뇰]]을 만났는데, 몬시뇰은 안젤로에게 [[로마]]에서 공부해보라고 권하였다. 안젤로는 로마 교황청립 아폴리나레 신학교에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 로마에서 공부했다. 아폴리나레 신학교에서 안젤로를 가르쳤던 교수 중에는 훗날 [[비오 12세]]가 된 파첼리 신부도 있었다. 1901년(19세)에 [[이탈리아]] 정부는 신학생들에게 부여했던 군 면제 혜택을 폐지하고 신학생들도 군인으로 징집했다. 안젤로도 징집되어 이등병으로서 베르가모 여단의 병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한 [[사제(성직자)|사제]] 지망생에게 제일 힘든 것은, '군대 병사들의 분위기' 그 자체였다고 한다. 신학교에서는 하지 않는(혹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행동들을 거리낌없이 행하는 동료 병사들의 문화가 상당한 쇼크였던 듯하다. 하지만 가난한 시골 마을 출신인 덕에 체력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서 군대 생활에 나름대로 잘 적응했고, 병장 진급도 오히려 빨리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